2010년 07월 29일
맑시즘 2010을 다녀와서
0. 얼마전 우리 학교에서 개최된 행사인 맑시즘 2010에 비밀리에 다녀왔다. 2,3년 전부터 학교 곳곳에 붙어있던 벽보를 보고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란 생각을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으나 어찌어찌 여러 일들이 있어서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엔 총 4일 중 마지막날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무려 11,000원이라는, 학술대회치고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지만, 대한민국의 허물어져가는 좌파세력에 좁쌀만큼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서슴없이 지불하였다. 역시 난 쓸 때는 쓰는 사나이다.
전에 친구와 함께 왔던 역사학회의 학술세미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동시에 몇 개의 세미나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나는 그 중 좀 더 관심이 가는 주제를 선택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전엔 87년과 97년, 그리고 08년 이후의 체제논쟁에 관한 세미나와 세계는 과연 다극화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 중심주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인가에 대한, 딱히 새로울 것 없는 발표에 참석하며 식욕을 돋구었고, 점심을 먹고나서는 과연 레닌이란 어떤 사람이었나에 대해서, 주로 스탈린과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왜 우리는 레닌을 생각해야 하는가와 노동운동의 국제체제에 관해서 고찰해보는 세미나로 입가심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형이 남긴 양념 통닭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니까, 전체 학술대회의 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점심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암튼 내가 들어갔던 세미나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분석하여 여러분께 소개하기엔 너무 귀찮은 일일 뿐더러 그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에, 그냥 하루 동안 마르크스에 관한 네 번의 세미나에 참석한 소감과 느낀점 등을 짧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 우선 총평을 하자면, 이건 <맑시즘2010>이 아니라 <맑시즘7080>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나는 사실 마르크스를 잘 모르고, 더욱이 다함께에서 주최하는 맑시즘 시리즈엔 이번에 처음으로, 딱 하루만 참석하였을 뿐이지만, 솔직히 과연 이들이 머리털 뽑아가면서 논의하고 있는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바람직한 논의인가하는 질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물론 누가 들으라 해서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청해서 들었던 세미나였지만, 뭐 마르크스에 대해서 쥐똥만큼도 모르는 놈이 뭘 안다고 난리냐라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마르크스가 현대 사회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무시하자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산주의는 이미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패배한 이념이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안에서 생각해야한다는 입장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도 더 이전에 나타난 이론을 지금까지 마치 경전인양 떠받드는 현실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상황에 150년 전의 대천재가 내놓은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찰과 대안이 알맞게 들어맞을 수 있을까. 150년이면 한 나라가 부흥하고 멸망할 정도로 긴 시간인데, 그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의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이, 세미나를 듣는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마르크스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에 마르크스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아니고 150년이나 묵은 서양 철학자의 이상을 기준으로 비판하고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딘가가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시적으로 볼 때도, 통시적으로 볼 때도, 마르크스는 하나의 중요한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해답은 될 수 없지않을까 싶었다. 뒤이어 나올 느낌들도 이것과 비슷하면서 좀 더 세분화된 것들이다.
2. 두 번째는 바로, '노동자'라는 이름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본가와 노동자로 사회 계급을 분류하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저항 세력을 의미하는 말로 노동자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노동자'라는 이름에서 노동자들 자신은 자주성을 거세당한다. 물론 마르크스가 지적한대로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리듬마저 기계에 맞춰 활동하게 되었고 따라서 노동자라는 이름엔 수동적 태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나, 현대의 노동자에게도 과연 그런 정의가 100%들어맞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노동자는 라면 공장에서 스프 만드는 직공만을 말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자이며 피디들도 노동자이고, 작가나 시인조차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과연 이들에게도 과거의 정의를 가진 노동자란 이름이 어울리는 것일까? 게다가, 앞서말한 공장의 직공 역시 과거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기본적인 학업 수준도 과거의 노동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며 이제 노동자들은 단순히 지배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피지배자와 같은 행동만을 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도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사주와의 관계에서도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무시한 채 노동자라는 굴레를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약간 머리 안좋고 힘좋은 사람들이 가지는 직업'이라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노동자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한계가 그들 스스로를 묶어두는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3. 세 번째 역시 두 번째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 맑시즘에서 사회 계급은 크게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이다. 이 같은 단순한 프레임만을 보면 모든 자본가들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노동자를 억압하며, 모든 노동자 역시 같은 환경 속에서 핍박 받으며 따라서 모든 노동자는 손에 손을 잡고 궐기하여 자본가 사회를 뒤집어 엎어야 하는 것이 지당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같은 잔인한 프레임은 자본가에게는 물론 노동자들 역시 자신을 하나의 규격에 끼워 맞추게 함으로써 노동자 집단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각 노동자 집단들의 상호 소통을 방해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이 같은 노동자 집단의 폭력적 단일화로 인해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블로칼라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미디어의 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그들 역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규격화된 노동자의 틀에 자신을 맞추기가 불가능함으로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자신들 사이에 선을 그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규격화된 노동자 틀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권리는 노동자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는 자본가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가 대 노동자란 프레임 안에서 보면 마치 이건희와 삼성 하청업체의 사장이 짜고 노동자들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청업체의 사장과 이건희야말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현재의 프레임은 노동자들이 모든 자본가들에게 저항하고 그들을 배척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들을 같은 편으로 몰아가고,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손잡게끔 만들어준다.ㅡ최소한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인식을 심어준다ㅡ 자본주의라는 사회 자체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자본가들 모두를 노동자의 적으로 지정하는 전략은 그 근본 목표에서는 매우 정당하지만, 오히려 그런 측면이 자본가들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는 기제로 작용한다면 자본가들을 하나하나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4. 이것 역시 위와 연관이 되기도 하는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아니 노동자가 탄생한 후부터 지금까지 쭉, 노동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도 본 것인데, 노동자들 스스로 자본가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오히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자본가나 노동자나 모두 돈을 열망하는 하나의 계급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계급인 신분제에서는 부르주아가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귀족이 못되고 평민이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사대부 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던 것처럼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하는 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차이는 노동자가 로또라도 당첨되어버리면 바로 무너져버린다. 이 같은 계급 분할의 한계로 인해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함으로써 노동자 세력의 분열을 유도하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노동자라는 계급에서 이탈하길 바람으로써 노동자 연대라는 말은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가 되길 갈망하는 자들이 과연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5. 이것은 약간은 다른 측면일 수도 있는데, 바로 민족에 관한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논의 중 하나가 바로 민족의 생성은 18, 19세기 근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이후 이는 하나의 정설이 되어버렸고, 홉스봄 스스로는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회에서조차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인데, 실제로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싶다. 민족의 구성 요소를 무엇으로 보든 동아시아, 특히 조선 같은 경우는 이미 그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교체제는 기본적으로 군주와 신하, 그리고 백성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체제이고, 따라서 유교 체제 속에서는 내부의 결속이 다져지는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타적 혹은 국수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되는데, 이런 현상 자체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한 만약 지금의 우리들이 민족주의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민족의식이 과연 근대이후 서양이 심어준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서양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영토의식과 애국심이 대두한 시기는 근대라고 할 수 있지만, 한반도의 경우 그 영토가 확정된 것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이고,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부터 몽고나 일본의 침략에 대해 백성들 스스로 의병을 조직해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한반도의 상황은 서양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민족의식에 대한 고려 없이 민족이란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유산이니 민족주의를 철폐하고 전 세계의 모든 프롤리타리아여 단결하자라고 부르짖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6. 위에서 이어서, 처음에 마르크스를 현재에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전통의 재발견이 그 기저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여기에 있는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를 여기 있게 한 사상들에 대한 비판과 재발견 없이 서양인의 관점에서 서양 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상을 그대로 실현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바보같은 짓이다. 현대 사회 체제는 99%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냐. 그러니 서양 사상이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다. 사회 체제는 사회 구성원의 특색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똑 같은 법 체계와 사회체제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간통죄를 만들었으며ㅡ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ㅡ아직도 선거할 때 지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체제는 딱딱하고 각진 틀이 아니다. 체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 따라 체제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회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에 대한 이해만으론 불가능하다. 체제적 모순 역시 해결해야 하지만, 체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지만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서양보다 훨씬 위계적인 계급주의와 연고주의, 학벌주의는 이런 사람에 대한 부주의에서 나온 우리나라만의 폐해이다. 이 문제를 마르크스가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노동자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이 민족과 국적을 넘어서 연대하면 가능하다는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것은 현실과 본성은 물론 미래까지 무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대충 이정도 생각을 했다. 사실 조금 더 있긴 한데 시간도 너무 늦었고 하므로 귀찮으니 패스하고, 나는 정말 마르크스에 대해서 쥐똥만큼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한 이야기에는 모순점도 많을 수 있고 내 무지를 증명하는 내용 역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니 까주신다면 기꺼이 환영.
밸리 보낼만한 데가 딱히 없어서 무려 일상밸리로...
# by | 2010/07/29 22:44 | 생각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