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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 2010을 다녀와서

0. 얼마전 우리 학교에서 개최된 행사인 맑시즘 2010에 비밀리에 다녀왔다. 2,3년 전부터 학교 곳곳에 붙어있던 벽보를 보고 한 번쯤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란 생각을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으나 어찌어찌 여러 일들이 있어서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엔 총 4일 중 마지막날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고 무려 11,000원이라는, 학술대회치고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을 지불해야만 했지만, 대한민국의 허물어져가는 좌파세력에 좁쌀만큼의 도움이라도 되고자 서슴없이 지불하였다. 역시 난 쓸 때는 쓰는 사나이다.

 

전에 친구와 함께 왔던 역사학회의 학술세미나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동시에 몇 개의 세미나가 동시에 이루어졌고, 나는 그 중 좀 더 관심이 가는 주제를 선택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전엔 87년과 97년, 그리고 08년 이후의 체제논쟁에 관한 세미나와 세계는 과연 다극화될 것인가 아니면 미국 중심주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인가에 대한, 딱히 새로울 것 없는 발표에 참석하며 식욕을 돋구었고, 점심을 먹고나서는 과연 레닌이란 어떤 사람이었나에 대해서, 주로 스탈린과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왜 우리는 레닌을 생각해야 하는가와 노동운동의 국제체제에 관해서 고찰해보는 세미나로 입가심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형이 남긴 양념 통닭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니까, 전체 학술대회의 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점심시간이었다는 말이다.

 

암튼 내가 들어갔던 세미나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분석하여 여러분께 소개하기엔 너무 귀찮은 일일 뿐더러 그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도 않기 때문에, 그냥 하루 동안 마르크스에 관한 네 번의 세미나에 참석한 소감과 느낀점 등을 짧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1. 우선 총평을 하자면, 이건 <맑시즘2010>이 아니라 <맑시즘7080>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나는 사실 마르크스를 잘 모르고, 더욱이 다함께에서 주최하는 맑시즘 시리즈엔 이번에 처음으로, 딱 하루만 참석하였을 뿐이지만, 솔직히 과연 이들이 머리털 뽑아가면서 논의하고 있는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바람직한 논의인가하는 질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물론 누가 들으라 해서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청해서 들었던 세미나였지만, 뭐 마르크스에 대해서 쥐똥만큼도 모르는 놈이 뭘 안다고 난리냐라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마르크스가 현대 사회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무시하자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산주의는 이미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패배한 이념이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고 자본주의 안에서 생각해야한다는 입장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도 더 이전에 나타난 이론을 지금까지 마치 경전인양 떠받드는 현실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과연 오늘날의 상황에 150년 전의 대천재가 내놓은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찰과 대안이 알맞게 들어맞을 수 있을까. 150년이면 한 나라가 부흥하고 멸망할 정도로 긴 시간인데, 그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의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이, 세미나를 듣는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마르크스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에 마르크스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회 문제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아니고 150년이나 묵은 서양 철학자의 이상을 기준으로 비판하고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딘가가 비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시적으로 볼 때도, 통시적으로 볼 때도, 마르크스는 하나의 중요한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해답은 될 수 없지않을까 싶었다. 뒤이어 나올 느낌들도 이것과 비슷하면서 좀 더 세분화된 것들이다.

 

2. 두 번째는 바로, '노동자'라는 이름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본가와 노동자로 사회 계급을 분류하며 자본가 계급에 대한 저항 세력을 의미하는 말로 노동자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노동자'라는 이름에서 노동자들 자신은 자주성을 거세당한다. 물론 마르크스가 지적한대로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예속되고 자신들의 리듬마저 기계에 맞춰 활동하게 되었고 따라서 노동자라는 이름엔 수동적 태도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나, 현대의 노동자에게도 과연 그런 정의가 100%들어맞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노동자는 라면 공장에서 스프 만드는 직공만을 말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님들도 노동자이며 피디들도 노동자이고, 작가나 시인조차 노동자가 되기도 한다. 과연 이들에게도 과거의 정의를 가진 노동자란 이름이 어울리는 것일까? 게다가, 앞서말한 공장의 직공 역시 과거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기본적인 학업 수준도 과거의 노동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며 이제 노동자들은 단순히 지배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피지배자와 같은 행동만을 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도 이제 자신의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사주와의 관계에서도 역시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그에 따를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들은 무시한 채 노동자라는 굴레를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약간 머리 안좋고 힘좋은 사람들이 가지는 직업'이라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노동자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한계가 그들 스스로를 묶어두는 장애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3. 세 번째 역시 두 번째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 맑시즘에서 사회 계급은 크게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분류이다. 이 같은 단순한 프레임만을 보면 모든 자본가들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노동자를 억압하며, 모든 노동자 역시 같은 환경 속에서 핍박 받으며 따라서 모든 노동자는 손에 손을 잡고 궐기하여 자본가 사회를 뒤집어 엎어야 하는 것이 지당한 말씀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 같은 잔인한 프레임은 자본가에게는 물론 노동자들 역시 자신을 하나의 규격에 끼워 맞추게 함으로써 노동자 집단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각 노동자 집단들의 상호 소통을 방해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이 같은 노동자 집단의 폭력적 단일화로 인해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블로칼라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미디어의 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그들 역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규격화된 노동자의 틀에 자신을 맞추기가 불가능함으로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자신들 사이에 선을 그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규격화된 노동자 틀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권리는 노동자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는 자본가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가 대 노동자란 프레임 안에서 보면 마치 이건희와 삼성 하청업체의 사장이 짜고 노동자들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청업체의 사장과 이건희야말로 대립각을 세우게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현재의 프레임은 노동자들이 모든 자본가들에게 저항하고 그들을 배척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들을 같은 편으로 몰아가고,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손잡게끔 만들어준다.ㅡ최소한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인식을 심어준다ㅡ 자본주의라는 사회 자체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자본가들 모두를 노동자의 적으로 지정하는 전략은 그 근본 목표에서는 매우 정당하지만, 오히려 그런 측면이 자본가들을 단단하게 하나로 묶는 기제로 작용한다면 자본가들을 하나하나 고립시키고 각개격파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4. 이것 역시 위와 연관이 되기도 하는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아니 노동자가 탄생한 후부터 지금까지 쭉, 노동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책에서도 본 것인데, 노동자들 스스로 자본가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오히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자본가나 노동자나 모두 돈을 열망하는 하나의 계급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계급인 신분제에서는 부르주아가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귀족이 못되고 평민이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사대부 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던 것처럼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하는 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차이는 노동자가 로또라도 당첨되어버리면 바로 무너져버린다. 이 같은 계급 분할의 한계로 인해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함으로써 노동자 세력의 분열을 유도하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노동자라는 계급에서 이탈하길 바람으로써 노동자 연대라는 말은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가 되길 갈망하는 자들이 과연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5. 이것은 약간은 다른 측면일 수도 있는데, 바로 민족에 관한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논의 중 하나가 바로 민족의 생성은 18, 19세기 근대의 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에릭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이후 이는 하나의 정설이 되어버렸고, 홉스봄 스스로는 동아시아의 상황에 대해서는 보류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회에서조차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인데, 실제로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싶다. 민족의 구성 요소를 무엇으로 보든 동아시아, 특히 조선 같은 경우는 이미 그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교체제는 기본적으로 군주와 신하, 그리고 백성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체제이고, 따라서 유교 체제 속에서는 내부의 결속이 다져지는 동시에 외부에 대한 배타적 혹은 국수주의적 태도를 지니게 되는데, 이런 현상 자체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한 만약 지금의 우리들이 민족주의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민족의식이 과연 근대이후 서양이 심어준 것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서양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고 영토의식과 애국심이 대두한 시기는 근대라고 할 수 있지만, 한반도의 경우 그 영토가 확정된 것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이고,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부터 몽고나 일본의 침략에 대해 백성들 스스로 의병을 조직해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한반도의 상황은 서양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민족의식에 대한 고려 없이 민족이란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유산이니 민족주의를 철폐하고 전 세계의 모든 프롤리타리아여 단결하자라고 부르짖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6. 위에서 이어서, 처음에 마르크스를 현재에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아닐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전통의 재발견이 그 기저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재 여기에 있는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를 여기 있게 한 사상들에 대한 비판과 재발견 없이 서양인의 관점에서 서양 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상을 그대로 실현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바보같은 짓이다. 현대 사회 체제는 99% 서양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냐. 그러니 서양 사상이 적용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다. 사회 체제는 사회 구성원의 특색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똑 같은 법 체계와 사회체제를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간통죄를 만들었으며ㅡ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ㅡ아직도 선거할 때 지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체제는 딱딱하고 각진 틀이 아니다. 체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 따라 체제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사회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에 대한 이해만으론 불가능하다. 체제적 모순 역시 해결해야 하지만, 체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지만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서양보다 훨씬 위계적인 계급주의와 연고주의, 학벌주의는 이런 사람에 대한 부주의에서 나온 우리나라만의 폐해이다. 이 문제를 마르크스가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 노동자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이 민족과 국적을 넘어서 연대하면 가능하다는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 그것은 현실과 본성은 물론 미래까지 무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대충 이정도 생각을 했다. 사실 조금 더 있긴 한데 시간도 너무 늦었고 하므로 귀찮으니 패스하고, 나는 정말 마르크스에 대해서 쥐똥만큼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한 이야기에는 모순점도 많을 수 있고 내 무지를 증명하는 내용 역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니 까주신다면 기꺼이 환영.

 

밸리 보낼만한 데가 딱히 없어서 무려 일상밸리로...

by son50 | 2010/07/29 22:44 | 생각 | 트랙백 | 덧글(0)

거대한 글 part-3.

1. 들어가기에 앞서

19세기, 유럽의 열강들은 근대화된 기술을 앞세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자신들의 발자국을 새겨 놓았고, 동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170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생산량의 20%이상을 차지하던 청나라는 서유럽의 섬나라에 무릎을 꿇었고, 아시아 각국도 잇따라 좌초하고 말았다. 서양의 근대화는 이렇게 강렬하게 동양과 조우하였고, 동양은 어쩔 수 없이 그 흐름 속에 편입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


동양이 서양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까닭은 무엇보다 서양의 근대화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17세기부터 스스로 변화를 거쳐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본주의적 산업 사회를 이룩한 유럽은 동양에 비해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원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러한 근대화된 힘이 동양의 그것에 비해 더 큰 파괴력을 지녔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사실 서양의 근대화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선 그에 앞서 수많은 과정들이 선행되어야 하듯, 유럽의 근대화 역시 역동적인 변화의 연속이었다.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대항해시대와 식민지 개척, 네덜란드에서 발아한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한 봉건제와 새로운 세력의 갈등 등 일련의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혹은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가 완성되고,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적 체제가 완성되고 계몽의식이 발전,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본고에선 근대적 사회 체제의 기반이 되었던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과 그 변화를 이끌었던 사회·정치적 분위기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 당시에 동아시아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서양의 변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조선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왜 산업혁명이 아시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란 질문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산업혁명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고, 이는 지금 국제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서양의 입장에서 결과론적으로 살펴보는 것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꼭 일어나야만 했던 것도 아니고,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산업혁명을 통해서 서양이 근대화를 이룩했고 근대화가 가진 파괴력이 동양을 짓눌렀기 때문에 산업혁명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질문은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당시 아시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것이 서양과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 것인지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변화 과정을 우리가 지향해야할 것이 아닌, 단순히 우리와는 다른 과정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산업혁명의 원인


우선 산업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시작하도록 하자. 산업혁명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1700년대 중반부터 영국에서 백여 년에 걸쳐 일어난 경제적 변화로, 농촌적/수공업적 경제에서 도시적/기계에 의한 자동화 공장을 이용한 경제로 변화하는 과정을 뜻한다.
즉 산업혁명의 발발은 홉스봄의 말대로 “인간 사회의 생산력을 속박하던 굴레가 벗겨져 그 후로 인간과 재화 및 용역이 끊임없이, 신속하게, 그리고 현재까지는 무한하게 증식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립적 성장으로의 도약’ 속에서 영국의 사회·경제·문화적 구조는 완전히 자본주의적으로 탈바꿈했고, 새로운 시대로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산업혁명의 원인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 영국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영국을 제외한 타 지역과 영국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1700년대의 유럽사회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였고, 이는 영국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영국이 타 지역보다 달랐던 점은 자본주의적 농업경제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시민혁명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 영국은 프랑스와 같은 전제군주가 1600년대에 이미 시민혁명으로 인해 사라지고, 귀족과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의회가 국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명예혁명이 남긴 권리장전은 왕정의 복고 후에도 의회의 힘을 막강하게 유지시킬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국가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되었다.


의회가 중심이 된 정부는 사적 이윤과 경제발전을 정부 정책의 최고 목적으로 받아들였고, 당시의 전통적 농업을 소수의 대지주를 위한 상업적 농업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농토에 살고 있던 농민들을 강제적으로 내쫓는 인클로저(enclosure:울타리치기)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지주들이 양모의 가격이 오르자 양을 더 많이 기르기 위해 농토를 넓히려 그 안에 살고 있던 농민을 쫓아낸 것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농업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토지의 공동권이 배제되고, 사적 소유가 명시되는 등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농업체제가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상업적 농업체제로 변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업적 농업체제로의 변화는 생산성의 증가, 산업자본에 투입될 농업자본의 창출, 산업혁명에 동원될 노동력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산업혁명의 주요 동인이 되었고, 이와 더불어 선대제 가내 수공업의 성행, 식민지 쟁탈전에서의 승리, 인구의 증가 등이 뒷받침되어 영국에서는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산업혁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시민혁명과 프로테스탄티즘, 그리고 자본주의


앞서 산업혁명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상업적 농업으로의 변화를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업적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을 가능케 했던 기반인 자본주의 사상이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었느냐이다. 자본주의 사상이 영국에서 보다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시민혁명으로 인한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이라 볼 수 있다. 영국은 시민혁명을 통해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도 빨리 전제왕권을 일소하고 입헌 군주제를 세움으로써 국가 권력을 의회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전제왕정의 국가들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의회의 주요 구성원이 바로 지주적 성격을 가진 부르주아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의 영국 의회는 결코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현대의 의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의원은 물론 선거를 통해서 뽑혔지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40실링 이상의 수입이 있는 토지 소유자들뿐이었다.
따라서 의회는 지주와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에 불과하였던 셈이고, 시민혁명으로 인한 의회 민주주의의 성립이란 ‘시민’혁명이란 말과는 달리 단순히 사적재산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의회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확립하였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적 경쟁원리가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들의 결정은 농촌사회의 파탄으로 인한 농민층의 피해에 대해선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인 경제체제 확립이 가능하였다.


시민혁명으로 인한 의회 민주주의의 성립 외에도 프로테스탄티즘 역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확립에 기여하는데, 이는 시민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의원들이 대부분 청교도였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청교도는 과거의 가톨릭과 달리 신으로부터의 구원이 교회에만 있지 않고 세속에서 의무에 충실하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금욕적 생활과 소명의식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지배하는 문화 속에서 노동은 신성시되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곧 구원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에 비해 게으름은 범죄에 비견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게으른 자는 처벌되어야 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사회 속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농토에서 쫓겨나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은 억지로 산업 혁명에 필요한 노동 계급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처럼 시민혁명을 통한 의회 민주주의의 확립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는 영국 사회에 자본주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정착시켰고, 이 자본주의 의식이 밑바탕이 되어 산업혁명이 촉발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시야를 동양으로 옮겨보도록 하자. 이렇게 서양이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거듭하던 사이, 동양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4. 18세기 동아시아의 상황


17, 18세기의 동아시아도 서양만큼은 아니지만 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동아시아의 맹주 중국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들어섰으며, 청나라는 옹정제, 건륭제 등에 의해 건륭성세(乾隆盛世)를 맞이하지만, 18세기 들어 청나라는 이미 과거제도의 부패, 사대부들의 타락, 그리고 청나라의 통치를 뒷받침해주던 팔기군의 기강 해이 등으로 인해 쇠퇴의 기미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외정책은 안으로는 만주족이란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려 새로운 포용적 중화주의 정책을 취하며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노력하였고, 밖으로는 관동무역체제를 정비하여 서양 세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명말부터 이어져오던 서학에 대한 관심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명나라 때 들어와 발전한 서학을 중화주의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려 하면서 서학은 더 이상 청나라에서 자라나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은 16, 17세기에 막번체제를 정비하고 17세기의 발전을 18세기에 계승하며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나라의 등장과 함께 조선과 서양의 몇몇 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와 수교를 끊고 신국관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중화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 역시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쇄국을 실시하였으나 조선과 중국과는 달리 실용·과학적 측면에서의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민간부문의 주도 속에서 서학의 발전이 이어졌다. 물론 서양 문물의 근본적 정신이 아닌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수용만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지만, 청나라나 조선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서양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였고 무엇보다 민간부문에서 자연적으로 서양 문물의 흡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사대부들이 정치·사회·문화를 장악하고 있던 조선과 청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의 상황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심하게 요동치며 청나라에 대하여 북벌론과 북학론이 맞서던 혼란의 시기였다. 조정은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양상을 보이며 그들의 이익에 맞춰 백성들을 유린하였고, 반면 사대부 사회의 모순은 중앙 세력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세계를 다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결과 박지원과 정약용 등을 필두로 한 실학파들은 서학을 연구하고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도입하여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백성을 중심으로 한 체제로의 변화를 주장하였다. 이들의 선진적 사상은 당시의 중국 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혁명적 기획이었으나, 정조가 사망하면서 이들의 개혁정신도 사회에 반영되지 못한다.


정치에서의 혼란과 함께 사회 역시 계층의 이동이 일어나면서 긴장감을 초래하였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받고 신분을 팔았으며, 농업 생산양식의 변화는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지며 농촌 사회는 부농과 빈농으로 해체되었다. 또한 미약하나마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을 통해 상업활동도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신분 질서는 붕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처럼 18세기의 동아시아 역시 중세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그 극복을 위한 여러 시도들이 이루어지면서 사회·정치적인 변화가 조금씩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을 제외한 중국과 조선의 기획은 결국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토양을 사회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서양의 제국주의를 빼놓을 순 없겠지만, 본고에선 이를 지배계층과 정치 시스템의 측면에서 파악해보고자 한다.

 

5. 조선의 정치 시스템과 사대부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을 이루고 있던 유교와 사대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삼국시대부터 한자와 함께 전파된 유교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면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조선이야말로 유교적 세계관을 그 근본이념으로 하여 건국된 국가였다. 유교적 정치 시스템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관리의 등용에 있다. 유교적 체제 아래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거를 통과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물론 음서제도가 있긴 하였지만 과거를 통과 하여야만 높은 직책으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모든 양반들은 과거를 통과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이 과거는 본질적으로 세습에 의한 권력의 대물림이 아닌, 실력에 의한 선발이란 점에서 서양의 관리 등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영국의 피지배계층이 전제왕권의 전복을 통해 획득하고자했던 실력 위주의 사회가 유교국가에선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교는 그 근본이념을 민본주의(民本主義)로 하여 하늘의 뜻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대부는 물론 왕까지도 위민(爲民)과 태평성대야말로 무엇보다 지향해야할 가치로 삼고 있었으며, 과거에서도 주요 시험 과목으로 유교 경전을 택함으로써 유교적 가치를 평생 동안 공부하고 탐구하게끔 만들었다. 유교적 세계관이 민본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그 중핵으로 삼는 것과도 닿아있다. 유교는 삼강오륜을 그 기본 윤리로 하여 사람 간의 도리를 지키는 것을 중요시했고, 이는 합리적 이윤보다는 도덕적, 윤리적 관계를 먼저 추구하는 사회를 형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사적 이익보다는 동료들 사이에서의 명예가 우선시 되었고, 명예는 민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적 세계관의 실천에서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는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였으나 서양과 달리 백성을 그 테두리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유교적 정치 이념은 18세기가 되면서 끝없이 타락하고, 정신은 사라진 채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과거는 경화사족들의 권력세습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고, 사대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갈라져 소모적인 논쟁만을 일삼았으며, 이 와중에 백성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점점 더 힘들어져만 갔다. 그러나 조선의 사회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구축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변화할 수 없었다. 이황으로부터 시작된 서원은 지방의 곳곳에 포진하여 향촌사회를 장악하고 유교 이념을 구석구석에 퍼뜨렸고, 신분제 역시 애초부터 신분 상승의 길이 막혀있는 것이 아닌, 무과 시험을 통해 평민도 양반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정은 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무과의 합격 인원을 대폭 늘리는 식으로 대응해왔기 때문에 백성의 불만을 어느 정도는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유교적 사회 시스템은 사회 불만을 최소화하고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회는 안정적일 수 있었고, 반면 역동성은 부족하였다.


또한 유교의 도덕적, 관계 지향적 정치이념은 그 정신이 타락하고 형식만 남은 상태에서 지배계층에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정보다는 명분과 의리만을 중시하게 하는 풍토를 만들어내었다. 이 같은 지배계층의 의식은 명나라란 대중화(大中華)가 무너지고 오랑캐인 청나라가 들어서자 주체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북벌론을 펼치는 소중화(小中華)의식, 이어서 청나라가 망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조선중화주의로까지 이어지는 중화주의의 변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집권 사대부들은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에도 조선중화주의에 빠져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배격하고 청나라를 적대하였고, 그러한 대응의 기저에는 “중화를 유교적 도덕과 인륜질서”
로 압축해서 파악하고 중국을 오랑캐가 집어삼킨 상황에서 조선만이 중화를 잇는 정통 중화주의의 나라라는 명분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지배층의 폐쇄적 세계관 안에서 실학자들의 새로운 개혁 의식과 자주적 세계관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조선은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지 못한 채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6. 마치며


위에서 살펴 본대로, 영국에서 한창 산업화로의 이행이 일어나던 시기에 즈음하여 아시아 역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결국 근대화로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고, 동양은 서양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본고에선 근대화 실패의 원인으로 유교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다루어 보았다. 초기 조선 사회를 형성하고 안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던 유교이념이 후기로 가면서 형식만 남아 사회 역동성을 저해하고, 폐쇄적 세계관과 시대착오적 의식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체제가 합리적 체제에 비해 열등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선 의회 민주주의가 들어서며 효율적 자원 배치를 통해 산업화를 일구어 냈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회 구성원인 서민들은 배제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에겐 절대왕정이나 의회 민주주의나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고, 오히려 산업혁명은 농민층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유교적 사회 구조는 근본적으로 백성을 포함하는 사상이었으며, 후엔 백성이 왕과 같다는 인식까지 발전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 같은 인식은 서구 사회에선 절대왕정은 물론이고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인식이다. 사회 발전을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왕과 백성은 같은 것이란 인식까지 도달했던 동양의 유교적 체제가 한층 더 발전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교 사회의 폐쇄성과 정체성이 쌓여가는 반면 이를 해결할 개혁 사상이 자리 잡을 수 없었던 것이 근대화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서양의 근대화와 동양의 전근대화라는 담론 속에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숨어 있다. 그들은 이 담론을 통해 서양은 동양에 비해 먼저 발전하였고, 따라서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서양에 의해 이끌어져야 할 존재란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동양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태어난 나로서는 그들의 이런 논리가 상당히 불만스럽다. 식민지시대를 가져온 서양의 폭력성보다는 아시아를 비롯한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전근대성에 역점을 둔 그들의 설명은 다분히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고, 우리를 정복하고 이끌어야할 대상으로 보는 그들의 시선은 분명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제국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양은 근대화된 기술을 앞세워 동양을 집어삼켰고, 우리 나라는 한 발 먼저 서양을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 그 과정 속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추동한 힘이 무엇이었고, 당시의 우리와 비교해 어떤 점이 달랐을까를 알아보는 일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해석하고 우리의 한계를 짚어보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이번에 레폿으로 쓴건데 주제와 맞는거 같아서...

by son50 | 2010/06/12 01:39 | 생각 | 트랙백 | 덧글(0)

연극 -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

 

 

 

연극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는 꽤 난해한 내용이었다. 처음 등장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때부터가 뭔가 심상치 않았는데, 도그-험에 관한 극중극 내용이 나오고, 그것과 여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딱딱 아파졌다. 기본적으로 서사극적 전개 방식과 극중극에 대한 주인공의 개입으로 연극의 연극성과 실제에 관계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개와 인간의 잡종에 관한 극중극 내용이 극 영향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또한 여자 주인공 역시 주인공에게 일정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므로 간과하기도 어려웠다. 이렇듯 언뜻 개별적으로 보이는 여러 화소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찾는 일이 이 연극의 포인트를 짚는 중요한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소설, 그리고 여자의 관계를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작가는 소설을 쓰고, 여자는 소설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소설에서 말하는 바가 현실에서 체화된 인물이 되어 작가에게 또 다시 영향을 끼치고, 작가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 방황하다 소설의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 낸다. 이렇듯 세 화소의 관계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게 영향을 주고 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닌, 서로 상호 관계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작가는 인간과 개의 잡종인 도그-험이라는 소재와 자기가 도그-험인줄도 모르고 그를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 원장을 등장시키며 인간이 얼마나 포악하고 간사하며 어리석기까지 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수간호사를 통하여 인간과 도그-험과의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혁명적인 시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사실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속의 이야기를 단지 하나의 공상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로만 치부할 따름이다. 자신이 소설을 쓰긴 하지만, 그것은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따름이라고 믿는 것이다. 남자가 개를 죽였다는 사실은 남자가 가진 이런 점에 대한 암시를 품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남자를 대신하는 영웅으로 그려진 수간호사는 도그-험과 인간의 공존을 부르짖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인간이지만, 실제의 남자는 이웃집 여자가 개와 섹스한다고 오해하여 그 개를 죽여 버리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은 그의 소설이 그가 관찰한 여인의 손에 들어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여인은 정말 그 소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여인은 남자가 자신의 방을 무단 침입하여 자신의 개를 죽였음에도 그 소설의 작자라는 사실에 용서해주려 한다. 물론 그녀는 우발적으로 남자를 칼로 찌르지만,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가 여자의 개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가 그 이야기를 단지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는 데에 화가나 남자를 당신은 수간호사가 아니라 원장에 불과하다고 꾸짖는데서 사건이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남자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압력에 굴복하여 소설의 결말을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대중 영합적으로 바꿔버리지만, 소설 속에서 전하려고 하는 의미를 현실에서 체화한 여자는 그것을 그냥 두고보려하지 않았고, 결국 거기서 가장 큰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 여자와의 갈등을 거치면서 남자 역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자신을 결국 대중 영합적 결말과 다른 또 하나의 결말을 가진 소설을 만들어낸다.


연극은 이렇듯 소설을 매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여주며 점점 폐쇄화, 분절화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관계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도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을 도그-험이라 생각하고 세상에서 쫓아내려 하거나 혹은 그들을 통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하지는 않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들고, 그동안 보아온 세상의 수많은 소설과 영화를 단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심심풀이로만 여기고 그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를 묻는다. 그리고 서사극적 구조를 통해, 연극 속의 또 다른 연극이란 벽을 허물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연극이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장벽을 허물고 관객에게 직접 소통하고자 한다. 아마 감독은 자신이 이 연극을 통해서 하는 말도 다른 영화나 책들처럼 그렇게 소설 속의 공상으로만 인식되고 기억되기 보다는 진실로 관객의 마음에 다가가 관객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조금은 난해하게 느껴지는 연극이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저 연극이 보이지 않는 장막을 뚫고 나를 향해 온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 연극 밸리는 없구먼

 

by son50 | 2010/05/27 12:28 | 미분류 | 트랙백 | 덧글(2)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이와이 슈운지


아아. 14살, 15살. 그때에 대한 기억은... 재미있게도, 혹은 슬프게도, 그러나 마치 꼭 그래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때의 그날들이 지금까지도 가슴 어딘가에 떠돌면서 나로하여금 계속해서 어떤 상태를 잊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때 해결하지 못했던, 아니 그럴 수 없었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그것이, 아직 내 가슴에 살아서 나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 때를 도저히 넘을 수 없고, 나는 도저히 그 때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15살은 그런 것이다.

 

사실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하나 확실히 알지는 못하겠다. 그 새파란 하늘과 녹색 물결과 릴리 슈슈와 오키나와와 이지메와 자살이 어떻게 엮이는지 확실히 분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있다. 영화는 어떤 부분에서 나와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나도 모르게 묶여 있던 그곳을, 수 많은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그때를, 영화는 조금 더 잔혹하게, 그래서 더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상징하는 것이 뭐냐고? 아마 그것은, 너무 뻔하긴 하지만, 방황이 아닐까. 10대의 방황.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시작된 질문과 해답의 뒤섞임, 갑자기 다가오는 경계, 위험, 밀려나는 자아,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 혹은 무엇이든 해야만 함. 호시노와 유이치는 같은 공간에서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넘어설 수 없는 자아라는 거대한 벽에 대한, 절망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스물 여섯살이다. 스물 여섯살의 나이에서 보는 릴리 슈슈에 대한 오타쿠적 우상화는 정신나간 패잔병들의 디아스포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빼앗기고 방황하는 유대인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래서 그것을 경멸해야만 한다. 이제 곧 어른이 되어야만 할 나로서는, 그것을 경멸하고 제거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후벼파고 해체하고 정리해야한다. 그것이 나를 응시하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면, 나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나를 제자리로 되돌아오게 만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15살의 나. 이제는 흔적도 없이 소거된, 더이상 실제하지 않는, 뒤틀린 무언가가 되어 초자아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니고 대장 어딘가 쯤에서 검게 쌓여가는, 15살의 나.

by son50 | 2010/05/20 01:42 | 영화 | 트랙백 | 덧글(0)

거대한 글 - part 2

지난 번에 역사에 대하여 쓰다가 뭔가 끝 맺음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마저 그것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지난 역사를 수박 겉 핥기로나마 한 번 훑어봄으로써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 민족이란 개념의 탄생은 통일 신라시대 이후부터라는 것이며, 거기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순히 무력과 자원경쟁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며 따라서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정치 중심적인 환경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치 중심적 환경이 뜻하는 바는 자원의 조직과 물자의 이동이 민간 부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관료제, 즉 제도의 발달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 관료제의 발달은 단순히 중앙 집권 국가의 완성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이 아닌 제도로서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치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며 정치는 필연적으로 명분 위에 성립되는 것에서 볼 때 정치 중심 국가로 발전했다는 것은 나라의 기초가 그 어떤 사상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이야말로 문치주의적 사상이 완성을 이룬 나라라고 볼 수 있으나 그 기반은 삼국 통일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선과 그 이전의 국가에서 사상적 기반이었던 종교에 대하여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종교와 사상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삼국시대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제의 확립을 위하여 율령을 반포함과 동시에 불교를 받아들이며 불교는 단순히 내세의 구원을 비는 종교적 의미 외에도 체제화되어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였다. 종교가 체제화 되었다는 것은 서양과 비교하여 큰 차이를 보여준다. 서양에서는 가톨릭이 체제화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체제와 갈등하거나 체제 위에 군림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카놋사의 굴욕'사건이다. 왕과 교황의 갈등에서 교황이 승리한 이 사건에서 보듯, 서양의 가톨릭은 물론 백성들에겐 우리의 불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치적인 면에선 체제 속으로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대치하는 현상을 보여줬다. 그러나 불교는 전적으로 체제화되어 지배계층은 불교의 윤회론을 신분제도를 합리화하는데 이용하였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다 공고히하는데 사용하였다. 사실 내가 불교에 대해선 그리 아는 것이 없어서 이정도 뿐이 쓰지 못하겠다. 나중에 불교에 대해서 더 공부해봐야겠다.

 

어쨌든 고려시대까지도 불교는 왕의 바로 밑에서 하나의 국가 제도로 자리잡으며 나라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이후엔 역시 고인 물은 썪기 마련이듯 폐단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절들이 엄청난 사전(寺田)을 보유하며 그들 자체로 기득권이 된 것인데, 조선조에 들어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편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쨌건 조선시대 들어서 국교는 불교에서 유교로 이동하고, 학문을 통한 수양을 중시하는 유교는 나라의 기틀을 사대부 중심으로 옮겨 놓으며 문치주의를 완성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는 사상적으로 체제화되어 국가의 정치화를 가속화시킨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유교가 어떤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살펴보며 유교의 문치주의적 특성에 대해 잠깐 짚어보았지만, 여기서 유가의 사상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자. 실은 유가에 대해서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이나, 이번에 청강으로 유가철학 특강을 들었으니 쥐 오줌 만큼은 남은 것이 있다고 믿으며 한 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유가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관계 중심적이다.ㅡ라고 나는 느꼈다ㅡ 대상을 단순한 대상 그 자체로 보려 하지 않고, 상황과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다. 백성이 있어야 왕이 있는 것이고, 자연이 있어야 인간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는 유가, 즉 동양의 자아 정체성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중국의 어떤 학자는 동양의 인간관을 '동심원적 파동'이란 말로 정리했다고 하는데, 물에 조약돌을 떨어뜨리면 그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 동양에서의 인간관 역시 개인을 중심으로 가정, 사회, 세계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 동양에서는 자신을 따로 떨어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세계 속에서 조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에 비하여 서양은 개인을 세계와 대립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개인은 세계에서 분리되어 세계와 대립, 갈등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의 가장 큰 예가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큰 문화 향유 형태인 비극은 하마르티아, 즉 운명적 결함을 가진 위대한 개인이 세계와의 대립 끝에 파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잘 알려져 있는, 운명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오이디푸스를 그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양에서의 개인은 오직 세계와 대립할 때에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곧 세계를 이분법으로 보는 그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살짝 짚고 넘어가자면, 어떤 서양의 철학자는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변주에 불과하다고 설파하였다. 이 말인 즉슨, 대부분의 서양 철학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론'처럼 현상 너머의 어떤 절대적인 실체를 상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서양의 이분법적 세계관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분법이란 것은 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기준을 상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인 셈이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몸과 영혼, 인간과 자연, 지배자와 피지배자, 문명과 야만 등으로 세계를 양분하여 인식하고, 자신들을 월등한 것으로, 남들을 하등한 것으로 깎아내린 그들의 심리가 결국 제국주의로까지 이어졌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론과 이분법을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이는 사실 상당히 복잡한 것이다. 서구 사상의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은 동양과는 매우 다르면서도, 지금의 서구 중심적 체제를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꼽는데, 여기서 작업을 통해 인간은 자연적인 순환에서 벗어나 항구적으로 세계를 지탱하는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거기서 자연세계와 인간 세계의 구분이 일어난다고 설파하고 있으며, 인간의 생존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과 인간 세계를 구조하는 작업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러한 구분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노예가 매우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부산물로 받아들여졌던 까닭은 바로 노예가 인간을 자연적 순환으로부터, 즉 필연적 조건으로부터 독립시켜주는 도구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노예가 하는 필연성에 종속되는 일은 겉 모습은 인간이나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동물로서의 인간이 하는 일로  치부했고, 따라서 노예는 단순한 서비스의 제공자가 아닌 인간 이하의 삶에 스스로를 바친, 따라서 억압받아야 마땅한 동물적 인간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ㅡ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 사회의 대부분의 노예는 전쟁에서 패배한 부족이었고, 그리스 시민들은 전쟁에서 패한 자들이 노예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노예로서 사는 것보다 자살하는 것이 훨씬 미덕이었고, 노예는 자살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ㅡ이와 반대로 노예가 제공하는 필연적인 소비품 위에서 인간 세계의 항구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시민>으로 보고 폴리스의 미래를 결정하는 시민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서구에선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구분하였으며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까닭은 자연적인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세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서구에서는 필연적으로 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영국과 청나라의 아편전쟁에서 서구와 동양의 차이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다시 유가의 사상으로 돌아와서, 이 같은 유가의 관계 중심적 철학은 조선왕조를 500년이나 지속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었다.ㅡ고 나는 생각한다ㅡ조선에는 경국대전이란 법이 존재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통치는 경국대전이 아닌 관습에 의해 행해졌다. 앞서 파트 원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삼사의 선발 방식의 경우도 경국대전에 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습에 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었고, 나라에 어떤 일이 있을 경우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과거의 실록이었고, 그 실록에 없으면 고려의 실록이었으며, 고려의 실록에도 없는 경우는 중국의 경우를 찾았고, 그 다음에야 법전을 뒤질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에서 법은 정말 단순한 기초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 기초 위에서 유교 사상에 의거한 관습들이 생겨났고, 그 위에서 통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문치주의란 말도 경국대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무슨 일만 나면 법부터 찾는 지금 사회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조선의 이같은 통치는 관계중심적인 유교 사상을 드러내는 매우 훌륭한 예이다. 지금 우리의 경우 판단의 근거는 법에 적힌 글이고, 많은 사람들이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행위를 하며 합법적이라는 말 뒤로 은밀히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이나, 조선에서는 상황적 문맥에 따라 과거의 관습에 의하여 일이 해결되었으므로 언어가 가지는 한계를 경험이라는 도구로 어느 정도 카바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관습법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때는 그랬다.

 

사실 성문에 대한 관습의 우위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관습이라 함은 생활에 축적된 경험이고, 그것은 사회의 기본 뼈대를 구성하는 사상을 기준으로 자라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상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립된 것이 관습이라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성문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는 사회에선 그만큼 경직된 정의보다 이해 당사자들이 서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정의를 중요시 여기게 된다. 사실 이것은 그 한계 역시 명백하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때만 가능하다. 어느 하나라도 그 사이의 허점을 노리고 집요하게 파고든다면 그러한 통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관습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암묵적 동의를 이용하여 그 사이를 자신의 뜻대로 이용하려 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러한 관습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습에 의한 통치가 제대로 굴러가게 된다면 사회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농민반란이 한 두번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도정치란 관습적 정치는 왕조의 건강성을 담보해주는 중요한 장치였다. 조금 더 거기에 대해서 분석해보자면, 앞서 말했듯이 유교는 기본적으로 지배층의 권력이 피지배층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고, 과거란 제도를 통해 지방의 현실에 대해 잘 알고있던 사대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면서 그들의 사정에 맞는 정치를 꾀할 수 있었다. 또한 역시 앞서 말했듯 지방의 사대부들이 단순한 관리 준비생이 아니라 향촌의 운영을 담당하면서 향촌 출신의 관리들과의 소통을 통해 지방의 목소리를 잘 전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선 말기에 가면 그러한 사상적 구조가 붕괴되면서 벌열가문 등의 등장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긴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유지된 기간 동안에는 양반이 아닌 자들도 살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농민 역시 과거를 볼 수 있었고, 무반의 경우에는 양반이 아닌 양인들이 훨씬 진출하기 쉽게 제도적으로 정비해줌으로써 신분 상승의 기회 또한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

 

파트 쓰리는 또 다음에... 워낙 거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빠지는 것들이 많다...;; 그래도 이해해주길.

by son50 | 2010/01/13 14:50 | 생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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